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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횰

(@hyol_23)

글: 밸

(@20475_U)

횰.png

마리네뜨는 눈을 눌러 감았다. 이건 아니야. 이건… 내가 원했던 것이, 네가 원했던 것이, 모두가 원했던 것이 아니란 말이야…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내가 무엇이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어. 모르겠다고…….


 

 몇 주 전, 나와 블랙캣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빌런을 상대하고 있었다. 몇 주간 계속 빌런의 약점이 보이지도 않았고, 행운의 부적을 어떻게 써야 할지도 모르겠고, 자꾸만 질 까봐 불안했다. 여태껏 이런 적은 없었는데. 내가 모든 걸 다 처리할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빌런들이 나타나면 심장이 툭 하고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심호흡하고 변신을 했지만 굳게 말아쥔 손에 힘이 자꾸만 풀렸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코끝이 아릿했다. …아니야. 아니야, 나는… 나는 레이디버그니까. 시민들을 지켜야 해, 나는… 영웅이니까…

 블랙캣은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괜찮다고 눈웃음을 한 번 지어주고는 빌런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빌런이 나를 보자마자 코웃음을 치더니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왜 온 거야?"

"…어?"

"왜 온 거냐고."

"왜, 왜냐니? 나는 영웅이잖아. 빌런을, 그러니까 너를,"

 웃음소리가 내 귀에 커다랗게 울렸다. …글쎄. 실소였었나.

"나를 뭐? 네가 나를 뭐 어쩌게? 이렇게 무능한 레이디버그가 영웅이라고 자신을 지칭할 자격이라도 되나?"

"……."

"레이디버그, 듣지 마! 원래 이런 거 그냥 무시했었잖아! 이건 너답지 않아, 제발, 레이디버그…."

 애절한 블랙캣의 목소리가 퍼졌다. 눈물이 주룩 흘렀다. 블랙캣도 지난 몇 주간 이렇게나 무능한 날 지켜보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자신이 이토록 사랑했던 당당한 사람이 무너져가는 걸 보면서, 블랙캣 너는 대체 무슨 느낌이 들었을까….

 허공을 내 시야에 가득 채우고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빌런도 이런 내 모습에 당황한 듯 잠시 머뭇대다 이내 악랄하게 웃어 보이고는 나를 공격했다. 저 멀리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아팠다. 아팠고, 슬펐다. 끊이지 않는 눈물을 계속해서 닦아내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블랙캣은 빌런과 싸우고 있었다. 블랙캣, 너는 왜 그대로야? 왜 나만 이렇게 변한 거야? 왜, 왜 그렇게 여전한 건데 왜……. 비틀거리며 일어나 요요를 돌리며 빌런에게 전속력으로 뛰어갔다. 빌런은 그런 나를 쉽게 막아버리고는 쓰러뜨렸다. 쓰러진 나는 뒤로 물러나며 두려움에 젖은 표정을 지었다. 그랬던 것 같다. 왜냐하면 정말로 두려웠으니까. 내 앞에 서 있었던 빌런뿐만 아니라 이런 나 자신도. 왜 무능력해진 걸까. 내 귀 쪽으로 손을 뻗는 빌런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 큰 소리가 났고, 눈을 뜨니 내 앞의 빌런이 길거리에서 자주 마주쳤던 이름 모를 소녀로 변해 있었다. 아마도 블랙캣이 검은 나비가 들어간 소녀의 물건을 부쉈던 것 같다. 소녀는 나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화난 것 같기도 하고 슬픈 것 같기도 한 표정으로 벌떡 일어나 블랙캣에게 인사를 하고 뛰어갔다. 블랙캣. 왜 갑자기 이렇게 잘 처리하는 거야? 그때 나도 모르게 블랙캣에 대한 증오가 조금 샘솟았다. …금방 사그라들긴 했지만, 순간 나는 나를 한 대 세게 때리고 싶었다. 무능해진 것도 모자라 동료를 질투한다고? 나는 정말, …어떡하지. 어떡하면 좋지. 어떻게 해야 하는….

 그때 호크모스가 나타났다. 이렇게 무너져가는 나를 보고 찾아왔구나. 내 탓이야. 정신 차려, 레이디버그. 정신 차려. 네가 정신 안 차리면, 우리 파리 시민들은 전부…….

 신음을 내며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요요를 돌리며 최대한 침착하게 호크모스의 눈을 바라보았다.

"여기는 웬일이야, 호크모스?"

"무슨 일이기는."

"……."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을 것 같아서 말이야."

 블랙캣은 호크모스에게로 달려갔다. 봉을 늘려 그를 바닥으로 꽂아 내렸다. 그런데도 호크모스는 다시 일어나더니 내게로 달려왔다. 나도 그에게도 달려가다 높게 뛰어 호크모스를 발로 찼다. 그런데 그는 조금밖에 뒤로 밀리지 않았다. 나는 공중에서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머리가 아팠다. 다시 일어나는 순간 호크모스가 내 입가를 주먹으로 쳤다. 나는 또다시 뒤로 나뒹굴었다. 왜? 왜 이러는 걸까? 비린 맛이 입안에 맴돌았다. 레이디버그는 행운의 상징 아니었나? 눈물이 차올랐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볼에 눈물길이 생겼다. 아… 눈앞이 흐렸다. 그가 성큼성큼 다가오는 게 보였다. 이제 어떻게 되든 상관없을 것 같아. 눈물은 내 얼굴을 자꾸만 적시고, 다가오는 검은 그림자는 나를 집어삼킬 것만 같고…… …….

"레이디버그!"

…블랙캣?

"…레이디버그, 호크모스는 내가 해치웠어. 너… 괜찮아?"

 블랙캣은 힘들어 보였다. 이마 쪽이 찢어져 있었다. 아플 것 같은데 왜 나를 먼저 걱정하는 건데. 저도 비틀거리는 주제에 왜 내 안부를 묻는 건데. 나도 블랙캣에게 괜찮냐고 물으려 했지만, 입이 멋대로 말을 뱉어버렸다.

"……아니. 아니. 안 괜찮아. 전혀, 하나도!"

"…."

"이게 괜찮아 보여? 지금 내가 괜찮아 보이느냔 말이야! 나는 이제 레이디버그가 아니야. 나는 지금! ……"

 ……나는 지금 그냥 마리네뜨일 뿐이구나.

"…."

"……지금 나는 레이디버그로 변신하기 전 모습이야."

"레이디버그."

 블랙캣은 눈가가 젖은 채로 나를 쳐다보았다.

"…지금 나는…."

"아니야."

"나는 레이디버그가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건가."

"……."

"레이디버그가 된 후로 나는 뭔가 특별해졌어. 성격도 꽤 긍정적으로 바뀌고. 좋은 일도 많이 일어났지. 레이디버그는 내게 행운 같은 존재였어."

"……."

"하지만 레이디버그가 아니라면 나는 아직 어두침침하고 자신이 불운하다고 믿는 그저 평범한 마리네뜨였겠지!"

 블랙캣의 눈이 커다랗게 트였다.

"뭐?"

"그저, 평범한, 마리네뜨였겠지…."

"마리, 마리네뜨……."

"미안. 미안해. 미안해 블랙캣. 나는 못… 못하겠어. 나는 레이디버그가 될 자격이 없어, 미안해, 나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내 미라클스톤을 하나씩 빼내서 블랙캣에게 건넸다. 빛이 나를 감쌌고 나는 아까와 다를 것 없는, 나약한 마리네뜨로 돌아왔다.

"…나는 영웅이 절대로 되지 못해."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응? 아까 나 봤잖아. 힘도 제대로 한 번 못 쓰고 내팽개쳐지는 모습 말이야."

"……."

"봐. 더는 부정 못 하겠지?"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자꾸만 모진 말들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대답을 차마 못 하고 나를 망연히 쳐다보고 있는 블랙캣의 손에 내 미라클스톤을 쥐여주었다.

"내 미라클스톤을, 마스터 푸께 가져가. 그리고 다른 레이디버그를 찾으라고 말씀드려."

 블랙캣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나는 뒤돌아서 외진 골목으로 들어갔다. 벽에 기대 스르륵 주저앉았다. 나는 소리 내서 울었다. 내 울음소리가 골목을 메웠다. 나는 영웅이 아니야. 나는 레이디버그가 아니야. 몸이 떨렸다. 어깨가 들썩였다. 턱에서 눈물방울이 투두둑 하고 떨어졌다. 나는……. 너무 무서워, 레이디버그인 나를 사랑했는데. 전엔 어떻게 살아왔던 거지? 나는 무엇이었던 거지?

 마리네뜨는 빠르게 지나가는 차가 내는 차가운 소리를 들으며 밤늦게 계속 앉아 있었다. 그는 자신의 귓불을 계속 매만졌다.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가슴판만이 그의 유일한 움직임이었다. 비가 오면 좋겠다. 비가 오면 좋겠다. 비가 오면 좋겠다. 마리네뜨는 생각했다. 그냥… 푹 젖어버리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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